농인 엄마의 희망과 사랑
농인 엄마의 희망과 사랑
  • GBN뉴스
  • 승인 2021.12.10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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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동네, 금천구에서
경기도농아인협회 미디어접근지원센터 이샛별
경기도농아인협회 미디어접근지원센터 이샛별

필자는 선천적 달팽이관 기형으로, 태어나서부터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늘 가지고 다니는 복지카드 앞면에 ‘청각장애’가 표기되어 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야 ‘청각장애’를 자각하고 사람들과의 소통을 피했다. ‘어차피 내 이야기를 못 하니 혼자 있는 게 차라리 나아’ 이런 생각으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커가는 동안 소통은 대부분 글을 써서 보여주는 필담이었다. 농인(청각장애인)을 자주 만나지 않는 비장애인들은 나를 만나면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더군다나 필담을 불편해하는 기색도 보였다. 그때마다 나는 ‘사람들은 청각장애인을 불편하게 생각하는구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조용하고 한적한 동네에서 태어나 나와 같은 장애를 가진 친구들은 전혀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세상에 농인(청각장애인)은 나 혼자뿐인가 싶을 정도로 청인(들을 수 있는 사람) 위주의 사회에서 어렵사리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비로소 스무 살이 되고 나서야 수어(수화언어)를 배웠다. 또 나와 같은 청각장애 친구들도 많이 만났다. 소심했던 지난날의 나는 수어와 농인(청각장애인) 친구들을 통해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지금까지 해 온 필담보다 생동감이 넘치고 감정 교류도 자연스러운 ‘수어’로 내 인생의 황금기를 만났다. 늦바람이 무서운 만큼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흥미가 없었던 공부도 대학교에서 전 과목 A를 받을 정도로 학업에 열중했다.

더 잘 보는 사람은 농인이고, 시각적인 부분을 잘 보는 특성을 살려 디자인학과를 전공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광고 디자인 회사에 취업하며 사회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렇게 사회생활을 하던 중에 농인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결혼 이후 아들 예준이를 낳았다. 아들을 낳기 전에 임신을 망설이던 때가 있었다. 저출산 1위라는 악명이 생길 정도로 한국은 아이를 키우기엔 어려운 시스템이었다. 비장애인도 아이를 키우는데 현실적으로 제약이 많지만, 나처럼 장애가 있는 부모가 아이를 키우기엔 얼마나 많은 일을 감당해야 할지 고민이 가득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아들의 존재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임신 확인부터 막달까지 금천구 수어통역센터의 도움으로 수어통역사와 함께 정기 검진을 다녔다. 수어통역을 통해 산부인과 관련 용어도 쉽게 알아갈 수 있었고, 평소 궁금했던 내용을 의사 선생님과 이야기할 때도 옆에서 수어 통역사가 차근차근 설명해 준 덕분에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농인의 삶에 없어선 안 될 수어통역사는 이미 내 삶으로 스며들었다.

‘쿵쾅쿵쾅’ 태아의 우렁찬 심장 소리는 수어 통역사의 손끝으로 봤다. 아주 건강하게 잘 뛰고 있다는 수어 통역사의 수어를 통해 우리는 벅찬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내 뱃속에서 ‘꿈틀꿈틀’ 태동을 힘차게 하는 아들을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복병은 따로 있었다. 막달이 다가오면서 나는 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아침이나 낮에만 나와 달라고. 수어통역센터는 평일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하기 때문에 밤늦게나 새벽시간대에 출산이 임박하면 수어 통역사가 바로 달려오기엔 힘든 시간대다. 소통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로서는 염려되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아뿔싸, 잠들던 중 진통이 강하게 느껴져서 미리 수어 통역사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 놓고 손말이음센터 통신 중계서비스를 통해 산부인과 당직실과 문자 중계로 통화했다. ‘지금 가야 할까요?’라는 내 질문에 산부인과 당직 간호사는 증상을 물어보고 난 후 바로 와야 한다는 대답을 했다. 잠든 남편을 깨워 부랴부랴 산부인과로 달려갔다. 약속된 수어 통역사가 깊이 잠들었는지 연락이 계속 안 됐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애타는 마음이었다. 농인(청각장애인) 임산부가 처음이었던 산부인과도 마찬가지였다.

분만실 간호사의 얼굴 표정과 입 모양을 살피며 스마트폰 메모장을 통해 밀려오는 진통 사이로 걱정과 불안감이 엄습했다. 수어 통역사가 연락이 안 되는 바람에 분만실 간호사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내 어깨를 다독이며 입 모양으로 천천히 말해 주었다. “할 수 있지요? 잘 할 수 있어요. 곧 아기를 건강하게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몇 번의 다독임 끝에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어렵사리 나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아들 예준이를 첫눈이 내리던 날, 새벽 다섯 시에 만났다.

아이를 낳은 후에야 수어 통역사와 연락이 닿았다. 감기약을 먹고 깊이 잠들었다는 속사정을 전해 들었다. 나는 충분히 이해했다. 나라도 그 야심한 시간대에 바로 달려올 순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나뿐만 아니라 농인(청각장애인) 엄마들을 위한 야간 수어통역사, 특히 24시간 수어 통역이 원활하게 지원되는 의료 시스템이 하루빨리 개선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아들 예준이는 농인 부모와 다르게 소리를 알아가는 아이 ‘코다’다. 코다는 농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청인 아이라고 지칭한다. 예준이는 ‘수어’와 ‘목소리’ 사이에서 흔들림 없이 농인 부모를 스스로만의 방법대로 이해하고 있다. 예준이가 다니고 있는 어린이집과 소아과, 예준이와 가는 곳마다 수어 통역을 지원해 주는 금천구 수어통역센터, 그리고 수어 통역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주는 모든 분들 덕분에 예준이를 키우는 재미를 톡톡히 느끼고 있다. 자신을 애정 가득 대하는 엄마를 마주 보며 ‘주세요’ 수어 동작을 보여 주는 예준이를 보며 흐뭇함을 감출 수 없는 고슴도치 엄마가 다 됐다.

이제 미운 네 살이 된 예준이를 통해 육아의 고충을 느끼고 있지만, 가끔은 격려해 주는 금천구에서 만난 이웃들을 통해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도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이처럼 금천구에서도 ‘수어’와 ‘농인(청각장애인)’을 알아가는 기회가 많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언제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농인(청각장애인)을 통해 우리가 몰랐던 부분을 알아가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나는 예준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삶의 일부를 즐겁게 공유할 수 있는 멋진 사람으로 컸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또 엄마의 장애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언어는 다르지만, 사랑이라는 이름 가운데 멋진 성장을 할 수 있도록 금천구의 모든 분들에게 응원을 부탁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