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도서-데미안
[문화산책]도서-데미안
  • 관리자
  • 승인 2014.07.19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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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철
추계예술대학교 전자정보도서관 사서


H에게.
결혼 후 책장을 사지 않았어. 내 집이 아니니까 딱히 살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더라고. 마침 돈도 없었지만. 아무튼 집에는 벽을 따라 책들이 아무렇게나 쌓아 올려져있어. 지난달에 책 더미들을 눈으로 훑다가 아직 다 읽지 못하고 처박아 두었던 그 책으로 우연히, 정말 우연히 손이 갔던 거야. 책을 펼치는 순간 너에게서 받았던 엽서가 한 장 뚝 떨어지더라. 맞아, 그 책은 2005년 내 생일에 네가 선물한 거였어. 오랜만에 보는 손글씨로 쓰인 생일축하 엽서가 정겹더군. 너는 대학시절 노천극장 계단에 앉아 수다 떨던 그때가 그립다고, 주문처럼 외우고 있다는 성경구절을 읊어주면서 지치는 직장생활도 잘 견뎌내자고 말했었지. 네 녀석과의 숱한 날들을 떠올리며 왠지 그리운 마음에 10년 만에 답장을 쓰고 싶어졌어. 무슨 얘기로 시작할까 펜을 이리저리 굴리다가‘언젠가 그리움에 관하여 말할 때 누군가에게 꼭 들려주고 싶었던 나만 아는 이야기를 꺼내보자’는 생각이 들었어. 마치 그 시절 도서관 옥상 벤치에서 자판기 커피를 뽑아 놓고 서로의 연애사에 대해 털어놓았던 것처럼 말이야. 그래, 그냥 안부인사도 없이 이렇게 편지를 시작한다.

지하철을 타고 시시한 직장을 오가다 보면 누구나 신기한 일 한두 가지 정도는 경험하게 되잖아. 내 얘기는 거기서 시작해. 늘 붐비고 갑갑하기만 하던 지하철이 내게 보여준 잠깐의 청량한 환상이랄까. 화창한 날이었는지 무더운 날이었는지 날씨는 기억나지 않아. 특별할 것 없는 일상적인 날이었지. 난 어딘가로 가고 있었고 갓 12시를 넘긴 이른 오후였던 것 같다. 앉을 자리는 없었어. 책을 하나 꺼내 귀찮은 듯 책장을 넘기고 있었지만, 사실 집중하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아. 가는 방향의 2-4 출입문 오른쪽, 그러니까 노약자석에 접한 문에 등을 기대고 어정쩡하게 서 있었어. 나와 마주한 출입문 바로 옆 좌석엔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 두어분이 앉아 계셨더란 말이지. 머리가 새하얗게 바래가는 노인 한분이 눈에 들어왔어. 사실 그분은 좀 뭐랄까, 맑게 늙었다고나 할까. 깨끗하지만 옷을 차려 입으신 건 아니었어. 적당히 닳은 흰색 운동화 차림에 마찬가지로 좀 낡았지만 깨끗하게 세탁된 옷을 입고 계셨지. 손엔 문고판 같은 작은 책을 읽고 계셨어. 평안한 얼굴로 등은 등받이에 기대지 않은 채 말이지.

‘무슨 책 일까나’하고 살펴보았지만 책 표지는 잘 보이지 않더라고. 햇살이 창을 통해 노인의 하얀 머리칼과 가느다란 어깨를 처언천히 지나는 걸 한참 바라보면서‘70세 넘어, 80세에 가까운 어딘가가 아닐까’하는 계산을 하고 있었어.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이었지. 그 순간, 짧은 순간이었지만 잠깐 시간이 멈춘 듯 했어. 아무런 경계심 없이 책을 읽고 있던 노인이 어느새 살며시 웃고 있는 거야. 천천히 음미하듯 그렇게 미소를 흘리시더라고.‘어라, 뭐지? 이 비현실적인 느낌은’하며 나도 모르게‘훗’하고 웃었어. 노오랗게 색이 바랜 손때 묻은 그 책이 대체 뭐 길래 그렇게 웃으시는 건가.
무슨 책이지? 책을 보며 슬그머니 웃는 노인을 보기란 쉬운 일이 아냐. 게다가 여긴 지하철 안이라고. 그렇지? 노인의 웃음이 하루키의 <먼 북소리>처럼 시나브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고 있었지만 어쨌든 나는 책 제목을 알고 싶어졌어. 너라도 그랬겠지? 어르신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그리고 그 미소 띤 시간을 빼앗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나는 책 표지를 보려고 집요하게 이리저리 기웃거려봤지만 워낙 작은 책이라 좀처럼 보이지 않았어. 그러는 동안 다시 몇 개의 정거장을 지나치고 나는 점점 안절부절못했지.‘아, 이거 참.’갈아탈 시간은 다가오고 초조한 가운데 내가 내리기 바로 전전역이었던 것 같아. 어르신이 한숨을 돌리시려는 듯이 고개를 들고는 반대편 창밖을 바라보시는 거야. 그리고 무슨 계시처럼 손에 든 책을 조금 들어 올리시는 거야. 순간, 그 순간 나는 봤어. 책 제목을 봤다고. 공기를 들이마신 채 호흡을 멈춘다는 느낌이란 게 바로 이런 거겠지? 그 책이 뭔 줄 알아? 난 정말이지, 진심으로 다리가 후들거리더라.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정말 현실이 맞나, 환상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어. 그 책, 제목이 말야…
데미안. 그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었어. 솔직히 울컥했고 이상하게 마음이 아리더라. 데미안을 여기서 다시 만날 줄이야. 나의 스무 살의 데미안이 그 어르신에겐 어떤 의미였을까. 그 미소의 의미는 뭐였을까. 혹시 어르신도 잊고 있던 스무 살의 데미안을 그때의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다시 만나셨던 건 아니었을까. 얼어붙듯 시간이 잠깐 멈춰버린 그때 지하철 안에서의 풍경을 떠올리면 나는 아직도 다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스러움에 빠지게 된다고.
갑자기 싱거운 결말인 것 같지만 얘기는 여기까지야. 몇 십 년을 산다는 것,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그 어르신과 같은 미소를 다시 지을 수 있게 되길. 정말 그렇게 되길 바라. 너와 내 안의 싱클레어는 잘 지내고 있느냐고 안부를 묻고 싶었어. 이만 줄일게. 총총.


2014/07/19 Copyrightⓒ경기복지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