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화병(火病)
[건강]화병(火病)
  • 관리자
  • 승인 2014.10.25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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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익
서울우리아이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분명 설마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필자는 상담실에서 자식에게 맞는 부모들을 종종 만난다. 물론 부모를 때리는 자식이 일차적인 문제지만, 더러는 자식에게조차 싫은 소리 한 번 못하고 그저 참기만 하는 성격이 원인이 되는 경우가 있다. 드물지 않게 이 버릇없는 자식의 행태는 제 아버지가 엄마를 대하는 태도와 흡사하다. 아버지는 아주 고지식하고 완고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집안에서 큰 소리 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고 아내를 무슨 하녀 다루듯이 대한다. 아이들 앞에서 늘 아내를 무시했고, 간혹 손찌검도 서슴지 않는다. 아들 문제도 늘 아내 탓을 했는데, “집에서 하는 일이 뭐가 있다고 애 하나 제대로 못 키우냐?”는 식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함께 살고 있는 시모는 일방적이고 다혈질이며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다.

보통은 만성 불면증이 있고 갑자기 가슴이 벌렁거리고 답답해지는 신체증상이 많다. 식욕이 늘 떨어져 있고 한번도 표현한 적은 없지만 마음속에는 억울함에 대한 분노가 늘 도사리고 있다. 다 집어치우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지만 자식이 걱정돼서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죽어 버리고 싶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갖고 있던 천주교 신앙 때문에 그렇게 하지도 못한다. 시간이 될 때마다 미사를 드리고 눈물로 기도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이런 사례를 가리켜 전형적인 화병이라고 할 수 있는데, 흔히 불안과 우울, 공황, 죽음에 대한 공포, 짜증, 불면과 같은 정신 증상과, 피로감, 소화불량, 식욕부진, 호흡곤란, 빈맥, 원인을 알 수 없는 전신의 통증과 같은 다양한 신체증상을 동반한다. 특징적으로 뭔가 덩어리 같은 것이 가슴이나 배의 윗부분에 맺어있는 듯한 불편한 느낌을 호소한다. 환자들은 이것을 나름대로 화, 울화가 맺혀서 그런 것이라고 설명한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화병이 마음속의 불만이나 분노, 울화, 한(恨)이 쌓여서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믿어 왔다. 조사를 해보면 우리나라 인구 중 4~5% 정도가 화병으로 고생하고 있다고 하며, 중년 여성, 특히 직업이 없는 가정주부에서 가장 흔한 것으로 나타난다. 초반에는 분노와 억울함과 같은 감정 반응이 주된 증상으로 나타나다가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불안, 초조 증상을 거쳐 나중에는 우울, 의욕저하, 허무 등의 증상으로 변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대부분은 가정불화, 직장 스트레스, 인간관계의 배신, 경제적 손실과 같은 직접적인 울화의 원인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화병이 우리나라에 흔한 이유는 한국문화의 특수한 상황 때문일 것이다. 화병 혹은 울화병은 기혼 여성에게 흔하고, 특히 불행한 결혼생활을 한 사람에게 많으며, 가난한 사람에 더 많이 나타난다. 소극적인 측면에서 보면 상처가 많고 한과 슬픔이 많은 사람, 상황적으로 체념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걸리기 쉬운 병이다. 하지만 이런 소극적 감정만 있는 것은 아니다. 원망과 분노, 증오와 같은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마음도 공존한다. 마음속에는 복수와 전복(顚覆)을 갈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마음뿐 행동할 용기도 에너지도 없다. 그래서 더 억울하고 무력하다. 이처럼 화병은 우리나라의 오래된 가부장적 가족 구조와 동물의 왕국을 방불케 하는 양육강식의 사회 가치가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화병에 걸린 사람들은 그 비통함, 분노와 억울함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참는 방법’을 주로 사용한다. 울화가 쌓이지 않으려면 슬픔과 화를 잘 드러내야 하는데, 그냥 자신이 참아버리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니 주변 사람들도 여기에 길들어져 한 명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다 쏟아버린다. 무슨 하수구처럼 오물이 다 집중된다. 울화가 모여 결국 병을 만든다.

슬플 때는 그냥 눈물을 흘리라고 권하고 싶다. 조용한 곳에 가서 큰 소리로 울어도 좋다. 마음이 맞는 사람, 자신의 사정을 이해해주는 사람과 같이 손을 잡고 함께 우는 방법도 추천한다.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면 교회든 성당이든 가서 울면서 기도해라. 심금을 울리는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방법도 좋다. 울고 나면 가슴에 응어리 진 것이 조금은 내려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대화도 참 좋은 방법이다. 대화할 상대를 찾아 자신을 열어라. 말할 사람이 없다면 상담가를 찾아가면 가장 좋다. 무슨 말이든 다 해도 좋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심정, 고충, 진퇴양난 속 선택의 어려움 등 모두 다 말로 풀어내라. 속이 후련해질 때까지 허리띠를 풀어놓고 대화해보라. 조금은 더 긴 계획을 두고 정기적으로 대화할 수 있다면 더욱더 좋다. 글로 표현할 수 있다면 더 좋다. 일기로 수필로 시로 메모로 편지로, 그 어떤 형식이라도 상관없다.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적어 내려가다 보면, 자신이 그 감정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자신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된 후에는 그 속에 허우적대지 않을 수 있다.

너무 이상적인 사람, 이상적인 아내와 어머니, 며느리가 되려고 하지 마라. 그런 사람은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다. 사회의 승자와 강자들이 임의로 만들어 놓은 사회의 페르조나 (Persona, 가면)를 의심하고 거부하라. 무엇보다도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과감히 버려라. 당신은 어린 아이가 아니다. 남에게 착한 사람이 되기 전에 자신에게 착한 사람이 되라. 자신에게 투자하고 자신을 돌보라.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소중히 여기고 외면하지 말라. 자신과 남에게 당당히 요구하라. 남에게 맞추기 전에 자신에게 맞추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 내 인생은 내게 주어진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나는 결국 내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 다른 사람의 인생은 그들의 몫이다.

누가 뭐래도 가장 좋은 대안은 노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신나게 노는 것이다. 놀이는 슬픔과 화, 울분을 몰아낸다. 화병에 걸린 사람은 놀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놀지 못해서 화병에 걸린다고 볼 수도 있다. 누구에게나 가슴 속 깊이 놀이와 쾌락에 대한 기본적인 본능이 내재되어 있다.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 그것을 깨울 수만 있다면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다.



2014/10/25 Copyrightⓒ경기복지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