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도서<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문화산책]도서<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 관리자
  • 승인 2014.11.29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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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철
추계예술대학교 전자정보도서관 사서


인터뷰 : 긴장한 탓인지 목이 마르고 은연중에 연신 입술을 핥게 된다. “선생님, 의식하지 마시고 편안하게 말씀하시면 돼요.” “자, 첫 번째 질문부터 시작할게요. 레디~ 고!” 카메라에 빨간 불이 켜지면서 인터뷰는 시작되었다. 내 간략한 자기소개가 끝나자 익숙한 인터뷰어가 웃으며 질문을 던진다. “어렸을 적 꿈은 무엇이었나요?” “저는 사실… ” 2006년 늦은 여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근무하는 학교에 한 학생이 인터뷰를 요청한 것이다. 모 신문사 온라인사업부인가에 인턴으로 들어갔는데 기획취재로 전형적인 30대 직장인의 인터뷰 영상이 꼭 필요하단다. 아는 사람 중에 내가 적임이라면서. ‘전형적인’이란 말이 좀 거슬렸지만 안면이 있는 녀석이라 “어디 사전질문지나 한번 살펴보자”고 운을 뗀 것만으로도 이미 낚였다고 생각했다. 세대별로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응답하는 방식이었다. 어릴 적 꿈은 무엇이었고, 이룬 것과 이루지 못한 것, 이루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앞으로의 꿈이 있다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10년 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면 그 모습을 그려달라는 흐름으로 촬영되는 인터뷰였다.

: 꿈이란 단어만큼 당황스런 단어가 또 있을까 싶다. 그 후로 거의 10년 가까이 흘렀는데 과연 내 꿈은 어디로 간 걸까. 사실 나는 특별한 꿈이 없었다. 뚜렷한 꿈을 가지고 정신없이 달려가는 어린 친구들을 보면 존경스럽고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당연히 ‘사서’가 꿈은 아니었다. 나는 무엇이 되고 싶다는 것보다 무엇을 하고 싶다는 쪽에 가까운 사람이었던 것 같다. 어떤 꿈이 있다기보다 지금 바로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주어진 일을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는지에 관심이 더 있었던 거다. 혹시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아직 나의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지금도 속은 기분이 드는 그때의 인터뷰를 생각하면 도대체 무슨 허황된 말을 지껄였을지 아찔하다.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 그렇지만 나도 항상 꿈을 꾼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기보다 이미지에 가까운 것이라서 뜬구름 잡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바로 이것이다.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스위스 작가 페터 빅셀의 책 제목을 발견하는 순간, 항상 꾸는 꿈의 실체를 만난 것 같아 반가웠다. 지금 이 글을 잡고 있는 아늑한 새벽시간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른 아침에 다시 출근해야한다고 생각하면 늘 시간이 아쉬운 것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아직 기다릴 수 있던 시절 :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지금 이토록 허둥대며 바쁘게 사는 것은 좀 느그읏한 삶을 꿈꾸며 기대하고 있어서였다. 느긋함을 꿈 꾼다는 것은 기대와 기다림의 시간일진대, 역설적이게도 나는 기다림에 익숙하지 못하다.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가 흥미롭게 끌렸던 건 제목도 제목이지만 바로 그런 ‘기다림’에 대한 사유의 책이었기 때문이다. 스위스 국민작가의 필력이 이끄는 기다림과 향수, 바라보기에 대한 깊은 사색이자 유유한 삶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왜 기차가 취리히에 도착하기 오분 전부터 승객들이 기차 복도에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지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바쁘다는 것과는 관계가 없을 것이다. 모두 똑같은 시간에 도착하게 될 테니.” 저자는 글을 읽거나 쓰기 위해 행선지도 없이 기차를 탈 때가 많다고 한다. 그리고 역마다 곧 도착할 사람들이 미리 복도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흔한 장면을 바라보며 ‘무엇을 기다리는 걸까?’ 묻는다. 하지만 ‘목적지가 정해져 있는’ 기차 안에서 자신도 조바심치며 기다림을 힘겨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내가 무엇을 기다리는지-예를 들면 베를린-알고 있기 때문이다. 목적지에 언제 도착하는지-17시24분, 베를린 도착-상당히 정확하게 예고되는데도, 아니 사실은 그래서 더 끔찍하다. 예고는 기다림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예고는 기다림을 방해하니까. 우리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마치 어제의 정확한 일기예보가 오늘의 날씨를 전혀 기대할 수 없게 만드는 것처럼, 우리는 ‘오늘’이 아닌 일기예보 속의 과거를 살고 있는 것이라고. “미래는 늘 희망이 없다. 우리가 미래를 알 때는.”

기다림을 기다림 : 아이가 ‘슈퍼윙스’라는 만화영화에 나오는 비행기 장난감을 선물로 받으려고 크리스마스를 하루하루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절대 지루해하지 않는다. 그것은 약속을 쉬 잊어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아이의 꿈은 장난감 자체가 아니라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관념, 그 기다림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각자의 꿈이 어떻든 삶은 필연적으로 계속 기다리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그러한 기다림을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으로 즐겁게 맞이하는 꿈을 꾸어본다.



2014/11/29 Copyrightⓒ경기복지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