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도서 <청춘의 문장들>
[문화산책] 도서 <청춘의 문장들>
  • 관리자
  • 승인 2016.05.04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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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꽃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난 꽃이 싫더라.” 불쑥 내뱉은 말이어서 그게 친구의 혼잣말이었는지 나를 향한 말이었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대꾸를 해야 하는 건가 망설이는데 다음 말이 이어졌다. “금방 피었다 시들어 버리는 게 기분 나빠. 그렇게 빨리 질거면 뭐 하러 피었냐고. 그 다음은 지저분해지는 것뿐이잖아, 안 그래?” “음, 그런가?” 누군가 지인의 문병을 가는 길이었고 보조석에 앉은 내 무릎 위엔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고 기억한다. 그때 우린 스무살을 막 건너고 있었다.

4월의 봄이 되었다. 시인 심보선이 ‘그때 꽃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 일생에 단 한번 뿐이라는 / 청춘이라는’이라 읊조렸던 그때 말이다. 이제 어떤 면에는 확실히 시들어 버린 게 아닐까, 느껴질 정도의 시간이 흘러버렸다. 돌이켜보면 친구의 넋두리 속에 있던 ‘꽃 피는 잠깐의 찰나’가 바로 청춘이었다는 사실을 그땐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남아있는 시간이 예전만큼 많지 않다는 생각 때문인지 봄은 매번 설레면서도 허허롭다. 지금이면 좋겠다 싶어 도서관에서 그간 미뤄두었던 <청춘의 문장들>을 찾아 꺼내 들었다. ‘작가의 젊은 날을 사로잡은 한 문장을 찾아서’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만큼 전부터 눈여겨보던 책이었다. 게다가 김연수 작가는 김중혁, 문태준과 함께 소위 ‘김천 출신 3인방‘ 으로 불리며 한국문단을 이끄는 젊은 작가 중 한 사람이라 벌써부터 흥미가 있던 터였다. 그만의 독특한 필력을 기대하면서 책을 펼쳤다.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

딱히 위로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표제지를 넘기자마자 첫 문장부터 너무 가혹했다. 꽃처럼 부지불식간에 피었다가 지고 그 기억으로 버텨나가는 가혹한 운명, 그것이 인생이란 말인가. 폐부를 찌르는 한 마디에 요사이 헛헛해진 마음의 동공은 한층 더 깊어졌다. 하아, 속으로 한숨을 내쉬다 불현 듯 ‘들고양이’의 뒷모습을 다시 놓치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져 급하게 페이지를 넘겼다. 첫 느낌은 기우였는지 다음 장부터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전개된다. <청춘의 문장들>은 한때는 전부였던 누구나의 젊은 시절에 관한 이야기이자 지나간 시간과 가족, 연인, 친구, 문학, 음악에 대한 그리움을 진솔하게 담아낸 수필집이었다. 작가의 젊은 날이 술술 잘 읽히는 문장으로 절절하게 녹아 있었다.

<청춘의 문장들>을 읽는 백미는 당연히 현업작가를 사로잡은 문장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글이랑 혹시 겹치는 게 있지는 않을까, 찾아보는 일이었다. 물론 책을 다 읽을 때까지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겹치는 부분은 한군데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청춘의 문장들>에서 인용한 글 중에 상당부분은 한시(漢詩), 특히 낯선 중국 당시(唐詩)와 일본 하이쿠(俳句)였다. 포크너나 가와바타 야스나리, 카잔차키스라든가 아니면 적어도 밀란 쿤데라나 하루키, 줄리언 반스 같은 작가의 글 정도는 언급되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었는데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인터넷을 통해 김연수 작가의 추천도서 목록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어쩐지 속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춘의 문장들>에 언급된 당시와 하이쿠는 정말 좋았다. 정형시 안에서 애달고 몌별하는 삶을 어떻게 그리 아름답게 담아냈는지, 그 매무새가 흡사 ‘청춘을 닮았다’, 고도 생각했다. <청춘의 문장들>의 주옥같은 문장들 사이에서도 쉽사리 잊혀질 것 같지 않은 시가 있어 소개하려고 한다. 서른여덟 살에 지병으로 요절한 여류시인 이시바시 히데노 石橋秀野의 다음과 같은 하이쿠 시다. '매미소리 쏴―/아이는 구급차를/못 쫓아왔네 蟬時雨子は担送車に追ひつけず’ (어느 여름날, 폐병이 깊어진 그녀가 구급차로 운송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어린 딸아이는 제 엄마가 구급차에 실려가는 게 무서워 울면서 쫓아오고 있었는데, 어느 결엔가 그 애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 일을 이시바시 히데노가 겨우 17자로 표현한 것이다.)

도그지어(dog’s ear)라는 말이 있다. 가끔 읽거나 자주 읽거나 혹은 전혀 안 읽거나 상관없이 누구든지 인생의 한 문장까진 아니어도 맘속에 밑줄 그은 책 한 구절은 있을 것이다. 우연히 한 문장을 발견하고 격앙된 맘으로 접어놓는 책 귀퉁이가 바로 개의 접힌 귀와 닮았다는 도그지어다. <청춘의 문장들>은 숱한 젊은 날에 그렇게 찾아 헤매던 도그지어가 아니었을까?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기억을 더듬어 내 청춘의 뒷모습을 떠올려보았다. 나 역시 그 시절에는 독서가 전부였다. 스쳐 지나가는 책장들 가운데 청춘의 문장을 찾아내는 일, 도그지어를 만드는 일이 나의 이야기를 지어나가는 일이 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결국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내겐 은연중에 늙음을 유예하는 행위이자 청춘의 그림자를 더 짙게 드리우는 일이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청춘의 문장들>을 읽는다는 것은 내 청춘에 대한 변명을 스스로 변호해나가는 경험이었다.

친구의 ‘꽃에 관한 명상’은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요즘은 왠지 꽃이 좋아졌어. 가만히 불러주면 내게로 와서 꽃이 된단 말야.” “언젠 싫다며..” “금세 지더라도 한순간 터질 듯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게 부럽다. 내 인생, 뭔가 그렇게 반짝반짝하고 피어보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워.”

봄이 깊어지고 있었다.

<양희철> 추계예술대학교 전자정보도서관 사서


2016/5/4 Copyrightⓒ경기복지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