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도서 미야모토 테루의 <금수(錦繡)>
[문화산책] 도서 미야모토 테루의 <금수(錦繡)>
  • 관리자
  • 승인 2016.06.15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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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말하지 못한 사랑이 아직 남아 있습니까

통근열차가 서서히 움직이고 차창 풍경이 붓질하듯 푸르른 빛으로 번지면 그제야 하루가 시작되었구나 느끼게 됩니다. 귀에 꾹꾹 이어폰을 눌러 꽂고는 어제 들었던 가벼운 음악을 다시 듣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늘 그렇듯 당신이 나타납니다. 마치 당신의 얼굴을 떠올리기 위해 매일 출근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엉뚱한 착각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출근길 그 잠깐의 시간에 당신이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당신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실제로 바로 내 옆에 있었으니까요.

여기까지 쓰고 나서 아내에게 편지를 쓴다는 건 정말 낯간지럽고 지난한 일이군, 이라며 금세 지쳐버리고 만다. 벌써 쓰고 지우기를 수차례, 진심을 담으려고 하면 할수록 하고 싶은 이야기는 고백하지 못한 짝사랑처럼 계속해서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다. 아무튼 당신에게 편지를 쓴다면 어떨까 상상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미야모토 테루의 <금수(錦繡)>를 읽고 있는 탓이었다.

<금수>는 작가의 전작 <환상의 빛>과 더불어 묘한 아우라을 갖고 있는 서간체 소설이다. 읽고 있으면 마치 주인공으로 빙의해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따라 읽다가 또 어느 순간에는 무작정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설국>으로 잘 알려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문학적 계보를 잇는다는 작가의 작품인 만큼 그 문체 또한 꾸밈이 없고 서정적이다. <금수>는 주인공 남녀, 35세의 여자 아키와 38세의 남자 아리마가 서로 주고받은 열네 통의 편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아키와 아리마는 부부였으나 어떤 돌이킬 수 없는 사건 때문에 헤어지게 되고 그 후로는 소식을 알 수 없는 남남으로 살아간다. 그로부터 10년 만에 우연히 뜻밖의 장소에서 마주치지만 그마저 이렇다 할 이야기도 나누지 못한 채 다시 이별하게 된다. 운명적인 재회에 미련이 남은 아키가 수소문 끝에 아리마의 주소지를 찾아 장문의 편지를 부치게 되고, 마침내 아키와 아리마는 10년 전의 사건 속에 매몰되었던 지난날의 자신들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금수>의 서사에서 핵심이 되는 두 사람의 이혼에는 누구나 수긍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그상식을 뛰어넘는 사건은 가족과 사회에 엄청난 파고를 일으켰지만 두 사람은 되레 심연으로 가라앉고 만다. 어느 누구도 변명하거나 따져 묻지 않았고 배려라는 이름으로 서로 침묵한다. 그 결과 부부는 스스로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이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 ‘미처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은 미련으로 자라나 <금수>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바로 10년이 지난 지금, 마치 바둑기사가 이미 승부가 끝난 대국을 복기하듯 아키와 아리마를 과거의 시간들로부터 소환해내고 있는 것이다.

<금수>가 여타 소설과는 달리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서정문학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비되는 개념으로 익숙한 서사문학이 서사 즉 스토리를 전개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면 서정문학은 이미 주어진 서사 속에서 인간의 정서와 감정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장르라고 할 수 있다. <금수>가 사건이 발생한 당시가 아닌 10년이나 지난 시점에 화자를 등장시켜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소설을 시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야기의 전개보다는 화자의 입을 통해 직접 인물들의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 서정문학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서정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미야모토 테루가 택한 서간체 형식은 신의 한수였다. 작가의 숨겨진 의도와 치밀한 계산 하에 기분 좋게 휘둘리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 것도 <금수>를 읽는 또 다른 묘미일 것이다.

<금수>는 10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을 두고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방대한 서사를 다루고 있지만 두 사람의 편지를 한 장 한 장 넘겨가다 보면 결국에는 부부 간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귀결된다. <금수>라는 작위의 세계가 던지는 메시지를 하나로 수렴한다면 이런 정도의 질문이 되지 않을까 싶다. '당신에게 말하지 못한 사랑이 아직 남아 있습니까?’

<금수>는 내용상으로는 1970,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흔하디흔한 치정극이다. 남자의 외도와 그 사이에 얽힌 죽음, 그로 인해 휘둘리는 인간의 운명까지 막장드라마의 어느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있다. 혹자는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이혼하게 된 부부가 10년 만에 우연히 마주치고 정리되지 않았던 지난날들의 이야기를 편지로 매듭짓게 된다는 스토리다, 라고 간단하게 정리할 수도 있겠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금수>를 禽獸로 읽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 막장드라마 안에는 두 주인공을 갈라놓았던 결정적인 사건의 전말을 풀어가는 소설적 재미와 그 속에 숨겨진 인간이라는 한 개체의 처연한 마음의 갈피가 편지라는 애틋한 형식으로 오롯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아내와 이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행복하지 않은건 아니지만 지금처럼 육아나 일에 매달려 살다보면 우리는 점점 없어지고 말 것 같다고, 이렇게 10여년을 보내고 아이가 제 삶을 찾아 떠나고 나면 그땐 우리는 ‘우리’가 아니라 ‘의리’만 남을 것 같다고 말이다. “연인들이 한 곳에 오래 있으면서도 권태를 느끼지 않는 것은 날이 새고 저물어도 늘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인데 우연찮게 그때 이야기의 결론도 바로 그것이었다. 10년이 지난 후에도 우리 두 부부만이 간직하고 있는 재미난 이야기를 잔뜩 만들어가자고, 지금부터 그 방법을 조금씩 연구해보자고 말이다. 어쩌면 편지를 주고받듯 당신과 나누는 이런 이야기가 <금수>를 錦繡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양희철> 추계예술대학교 전자정보도서관 사서


2016/6/15 Copyrightⓒ경기복지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