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에 만난 사람] 타국의 전선에서 애국을 실천하다
[6월에 만난 사람] 타국의 전선에서 애국을 실천하다
  • 관리자
  • 승인 2016.06.15 21: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월남전 참전자 김봉학 어르신을 만나

6월을 수식하는 다양한 표현 중 많은 이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것은 단연 ‘호국보훈의 달’일 것이다. 이는 6·25전쟁이 발발한 달이며 더불어 국토방위에 목숨을 바친 이의 충성을 기념하는 현충일이 제정된 달이기 때문이다. 매년 이맘때면 극장가에는 전쟁을 주제로 한 영화들이 줄지어 개봉한다. 이로 인해 우리는 일 년 열두 달 중 적어도 6월 한 달 동안은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애국심에 관해 생각해보고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며 되새긴다.

그러나 이러한 ‘호국보훈의 달’에도 달리 기억되지 않는 국가 유공자들이 있다. 바로 월남전 참전자들이다. 6·25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타국의 전쟁터에서 총검을 겨누어야 했지만, ‘패전의 용병’이라는 오명을 안은 채 우리의 기억 너머로 흐릿해져 가는 월남전 참전자. 그들의 공훈을 기억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위해 월남전 참전자 김봉학 어르신(72)을 만나보았다.


24세 청년, 애국심으로 월남전 파병을 신청하다

“6·25전쟁 이후에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며 북한을 견제했지요. 요새 젊은이들은 잘 느끼지 못하겠지만 그때 당시는 휴전협정이 이루어진 직후라 남북 간 긴장이 극에 달했어요. 미군의 주둔이 필수적인 상황이었지요. 그런데 얼마 후 월남전이 터졌고 미군은 병력을 베트남으로 이동시키려고 했습니다.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국군은 미군의 병력 이동이 국방력 약화로 이어질 것이라 우려했고, 군사력이 강한 미군이 이동하는 대신 우리 국군이 월남전에 참전하는 것이 국토수호에 유익하다고 판단하여 파병하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맹호부대 전투병으로 복무하던 김봉학 어르신은 우리군이 월남전에 파병하게 된 동기를 듣게 된 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 월남전 참전을 결심했다고 한다. 한반도를 뒤덮은 전쟁의 소용돌이는 스물네 살 청년을 너무 일찍 철들게 한 것은 아닐까. 이는 6·25전쟁의 발발연도조차 잘 모르는 오늘날의 젊은이들과는 다소 대조되는 모습이다.


민간학살, 그 오해와 진실

“민간학살이 없었다고는 말하기 어려워요. 그러나 사람들이 아는 사실 또한 왜곡된 부분이 많습니다. 우선 베트콩들은 우리 국군과는 다르게 군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다녔어요. 울창한 정글에서 적이 베트콩인지 민간인인지 구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죠. 특히나 그들이 무기 비슷한 것을 갖고 있을 때에는 공격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전쟁터에서는 나와 전우들의 목숨을 사수하는 것이 우선이니까요. 또 민가에서 전투를 하는 경우에는 미리 사전 안내방송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사전에 전투시간을 알려 민간인들이 대피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죠. 그러니 안내한 시간 이후 마을에 나타나는 모든 베트남 사람은 베트콩이라고 간주할 수밖에 없었어요.”

민간인은 공격하지 말라는 채명신 장군의 말씀을 항상 명심했다는 김봉학 어르신은 베트남 아이들을 볼 때면 6·25전쟁 당시 미군에게 초콜릿을 얻어먹던 생각이 나 자신의 간식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1999년 한겨레신문 기자가 처음으로 제기한 월남전 파병자의 민간학살 의혹. 그동안 우리는 그저 의혹과 항간의 소문만으로 월남전 참전자들을 편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건 아닌지…….


‘패전의 용병’이라는 오명에 관하여

“우리는 스스로를 패전의 용병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비록 전쟁에서는 졌을지 몰라도 전투에서는 수많은 승리를 했으니까요. 또한 월남전 파병을 통해서 우리 군은 많은 전투 경험과 노하우를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 군의 무기 역시 월남전을 통해 상당히 선진화되었어요. 특히 우리는 6·25전쟁 이후로 어려웠던 우리나라를 다시 일으킨 역군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월남전을 통해 얻은 자본으로 우리나라는 상당한 경제발전을 할 수 있었죠. 우리의 수고와 노력이 우리 후손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해 아주 기쁩니다.”

국가와 국민에게 바라는 것은 그저 월남전 참전자에 대한 인정과 따뜻한 시선이라는 김봉학 어르신. 국가를 위해 주저 없이 타국의 전선으로 뛰어든 김봉학 어르신이야말로 숨은 애국자가 아닐까. 또한 이러한 애국자들을 인정하고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이야말로 또 다른 애국자를 만들어내는 길이 아닐까.

대한민국 정부는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약 32만 명의 국군을 월남전에 파병했다. 이 중 5천여 명이 전사하고 1만1,000여 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이에 몇 배에 달하는 이들이 지금도 고엽제 후유증 등으로 고통받고 있다. 월남전 참전에 따른 미국의 보상을 약속한 브라운 각서에는 한국방위태세의 강화, 국군의 장비현대화, 차관 제공 등 14개의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누리는 평화와 물질적 풍요로움이 나라를 사랑한 수많은 젊은이들의 희생을 대가로 주어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호국보훈의 달, 우리는 잊혀져가는 월남전 파병자들의 공훈을 다시금 되짚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정성은 기자


2016/6/15 Copyrightⓒ경기복지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