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도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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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7.15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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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철
추계예술대학교 전자정보도서관 사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의 쓸모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는 동안 나는 계속 소설을 읽는다는 것의 효용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늘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 두리번거리면서도 역시 매번 답을 얻지 못하고 자신에게 되묻곤 하는 질문이었다. 왜 소설 따위를 읽는 걸까, 하고. 소설을 읽는다는 것이 내겐 과연 무슨 의미였을까, 왜 이렇게 지치지도 않고 읽고 또 읽는 걸까, 혹시 만약 쓸모가 없다면 그 쓸모없음의 쓸모라도 찾을 수 있을까, 칠순을 바라보는 35년차 노작가의 자전적 에세이를 읽는 것은 이러한 해묵은 질문들에 대해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여행이었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에 대한 몇 가지 단상과 함께 책을 소개하려 한다.

우선은 소설을 읽는다, 고 하면 나는 그 어감(語感)에서부터 그 행위가 이루어지기까지의 모든 과정들이 그냥 좋다. 소설을 읽는다, 고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해보기만 해도 무슨 말인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책’을 읽는다, 는 것보다 젠체하지 않아서 좋고 마치 《연애소설 읽는 노인》이란 책 제목처럼 달콤하지만 해롭지 않아서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책(冊)보다는 ‘소설(小說)’일 때 너무 직설적이지 않고 에둘러 말을 건네는 것 같아 조금 안심이라고 할까,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어서 좋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참 재미있다. 특히나 한 권으로 끝나지 않고 반복적으로 읽어나가는 습관적인 생활방식이 흥미로운데, 추측컨대 이는 필시 조물주께서 인간을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일 게다. 피조물 중에 인간은 너무나 창조적이어서 늘 다시 한 번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면 안 된다.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스처럼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산꼭대기를 향해 끊임없이 돌을 밀어 올려야 한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만족은 기대하지 말라’, 는 가혹한 신탁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은 또 부지런히 소설을 읽는다. 창조된 본능에 충실한 것이다.

또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인형 뽑기 게임과 같다. 조물주께서 조이스틱을 신중하게 움직이신 다음 결정 버튼을 누르시면 반짝 반짝 빛나는 은색 로봇 팔이 내려와 정확히 나를 집어 올린다. 나는 이제 내가 알지 못하는 낯선 장소로 옮겨질 것이다. 매번 반복되는 일이지만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맡겨진 역할이 무엇인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물론 여기서 조물주 역할은 그 세계를 창조한 소설가가 되겠지만 그도 역시 독자가 어떻게 모험을 즐기게 될지 전혀 모른다는 측면에서 절대자와는 사뭇 다르다. 바로 그런 ‘예고되지 않은 가능성의 세계’를 만나는 것이 소설을 읽는다, 고 말할 때 연상되는 장면이자 묘미다.

자, 이제 소설을 왜 읽는가에 대한 납득할만한 답변을 내놓을 때가 되었다. 그 질문은 일정기간동안 내 안에서 분열과 해체를 거쳐 재생산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대단히 사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소설을 읽는 이유는 내가 아직 소설을 쓰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독자는 작가에 비하면 아직 ‘나’라는 실체와 자신의 세계를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어중간한 존재들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다양한 작가들의 소설 속에서 자신에 대한 실험과 탐구를 치열하게 수행하고 싶은 것이다. 만일 삶이 자신을 증명해나가는 과정이라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긴 서사 속에서 자신을 차근히 발견해 나가려는 삶의 한 방식이자 투쟁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작가는 소설을 쓰고 아직 작가가 되지 못한 나는 그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이다.

하루키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밝힌 작가론에 따르면 소설을 쓴다는 것은 읽는다는 것과 매우 닮아있었다. ‘다양한 종류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을 ‘상대화’하는 것이 현재 내가 서 있는 지점에서 세계와 세계를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까지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는 것인데, 이 말은 소설을 읽는 독자 또한 누구나 자신의 세계 안에서 잠재적인 작가로서 존재한다고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하루키의 작가론이 일반 독자들의 인생론에 와 닿는 접점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아울러 거기에는 아마 ‘자기 치유’적인 의미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 즉 자신을 상대화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지금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형식에 끼워 맞추는 것을 통해, 살아가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다양한 모순이나 뒤틀림, 일그러짐 등을 해소해나간다―혹은 승화해나간다―는 것입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35년의 세월을 견뎌온 노작가의 작가론이자 인생론이 담긴 책이다. 작가의 작가론은 그의 전작들에서 여러 번 언급된 적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소설의 작법’에 대한 구체적인 견해를 피력한 글은 이 책이 유일하리라 생각된다. 아무러면 어떠냐, 하며 읽어 내려가는 소설, 그것은 하루키의 달리기에 대한 예찬처럼 읽는 동안에만 일어나는 감동이자 바로 소설을 읽는다는 것에 대한 모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2016/7/15 Copyrightⓒ경기복지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