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통역사가 바라본 농인의 세계] 농인과 청인이 동등하게 함께 사는 세상
[수화통역사가 바라본 농인의 세계] 농인과 청인이 동등하게 함께 사는 세상
  • 서다은 기자
  • 승인 2020.03.23 10: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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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인 사회에서는 수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농인(Deaf), 그 이외의 사람을 청인(Hearing people)이라고 부른다.
「알람 소리 듣고 일어나기, 식사하라고 부르는 소리, TV를 틀어놓고 필요한 정보를 들으며 각자 나갈 준비 하면서 대화하기, 자동차 경적에 놀라 피하기, 전철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공지사항, 강의, 회의, 전화, 음악 듣기」 등 청각은 우리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이 숨 쉬는 것처럼 ‘소리를 듣는 것’을 크게 인식하지 못한다. 소리를 통해 다양하고 방대한 정보를 수용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어쩌면 비장애인보다 청인이 더 일리 있는 명칭 아닐까?
그렇다면 농인은 어떨까? 「진동이나 방안이 환해지는 알람으로 일어나기, 식사 준비가 되었다고 눈앞에서 재촉하는 손과 표정, 얼굴을 마주 보고 수어로 대화, 화장실에서 빨리 나오라고 방정맞게 깜빡이는 형광등, 택배 왔다고 깜빡이는 경광등, 문자나 영상 전화, 자막 혹은 수어가 있는 영상」 등 일상생활 대부분이 시각 중심이다. 농인 사회에서는 청인과 농인이 사용하는 주요 감각이 달라서 사고방식, 언어, 문화가 다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시각적 정보가 가득한 곳에서 농인들은 그 자체로 온전하며 자유롭다.
안타깝게도 농인이 청인 사회로 발을 들이는 순간, ‘듣지 못하는 사람, 능력이 부족한 사람, 수동적인 사람’이 된다. 세계 어디든 청인이 다수이며 청각이 중심인 환경이기 때문에  농인은 능동적인 사회 참여가 어렵다. 어떤 농인은 이러한 상황을 ‘유리막이 나를 둘러서 갇혀 있는 느낌’이라 한다. 멀티미디어 시대로 들어서면서 시각화한 정보가 제작되어 농인들이 그나마 정보를 얻기도 한다. 그러나 전 분야에 걸쳐 제공되는 것이 아니어서 청인들이 얻는 정보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이다. 청인은 자신이 원한다면 언제 어디서든 배울 수 있다. 하지만 농인은 기관의 예산 편성이 돼 있는지, 통역이 제공되는지를 우선으로 고려해야 하고, 통역 제공이 안 되면 배우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병원에 가도 마스크를 쓴 의사가 무엇을 말하는지 유추하느라 진땀을 빼야 한다. 9시 뉴스도, 드라마도 접근이 쉽지 않다. 과거에 비하면 좋아진 부분도 있지만, 현시대를 사는 농인과 19세기의 농인이 만나 대화를 나눈다면 격세지감보다는 동질감을 더 느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청인이 농인처럼 완벽한 수어를 구사하는 것은 어렵다. 잘 봐야 하는데 들리는 것이 장애가 되어 오롯이 수어 맛을 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농인들은 청인이 당당한 표정으로 ‘언농하쇼영’ 같이 보이는 엉터리 수어로 인사를 해도 그것조차 반가워한다.
성경 마가복음(7:32-35)을 보면 예수님을 만난 농인에 대한 내용이 있다. 예수님이 농인에게 시각적인 행동을 보여주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구절로 익히 알고 있다. 필자가 농인을 만나기 전에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라는 구절을 보고 단순하게 ‘예수님이 농인의 장애를 안타까워 탄식하셨고, 고치셨구나. 행복하겠다.’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농인의 입장을 이해하게 된 지금은 다르게 보인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습 그대로 소중한데, 주신 것을 자유롭게 누리며 살지 못하는 농인의 마음과 그런 세상을 보시고 탄식하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필자가 통역하는 곳에서 만난 청인 대부분은 농인이 자신과 다를 바가 없음에 많이 놀란다. 청인과 농인의 언어와 문화가 달라 정보 공유가 원활하지 않아 여전히 농인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된다. ‘수화통역사가 바라본 농인의 세계’를 통해 농인과 농인 사회를 이해하고, 청인과 농인의 거리가 한층 가까워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