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복지, 조선족 이야기 Ⅱ
해외복지, 조선족 이야기 Ⅱ
  • 관리자
  • 승인 2009.11.21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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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복지, 조선족 이야기 Ⅱ


홍매화 | 1939년 증조부께서 강원도 춘천군을 떠나 만주로 이주하심. *중국 길림성 태생. *초등학교 때 심양으로 이사함. 이후 초, 중, 고를 심양에서 졸업. *2001년 한국으로 유학 옴. *2002.3-2006.8 중앙대학교 정경대학 신문방송학과 *2007.3-현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M.DIV 3학년 재학 중 원미언약교회(부천 소재) 유소년부 전도사



조선족의 민족 정체성에 대한 소고(小考)1

인간은 누구나 그렇듯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 속에 인생을 살아간다. 누구나 하늘에 가기 전까지는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이상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계속 되는 것 같고, 그 중에서도 조선족인 필자에게 민족 정체성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필자의 증조부모님은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던 1939년 정든 고향 강원도 춘천군을 떠나 만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일제의 경제적 핍박에 시달리다 못해 고향을 떠나게 된 것이라고 부모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조부께서는 춘천 태생으로서 반세기 이상을 중국에서 사셨다. 지난 호에서도 언급했듯이 중국으로의 이주 역사가 아직 100년이 채 되지 않는다.

시골뿐만 아니라 도시지역에서도 조선족들은 자기들만의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다. 처음 만주로 이주했을 때 언어문제 때문에 같은 민족끼리 촌락을 이루어 살다 보니 자치주로, 자치현으로 발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필자가 살았던 심양(ShenYang, 봉천의 현재 이름 )시에도 많은 조선족들이 거주하고 있고 조선족들이 밀집된 지역에는 초·중·고등학교들이 있다.

필자가 학교 다닐 때에만 해도 심양 도심지역에만 조선족 초등학교가 3개, 중고등학교가 7개 정도 되었다(당시 심양시 인구가 800만명 정도였음). 물론 외곽에는 더 많은 조선족 학교가 세워져 있었다. 이렇게 밀집되어 생활하기 때문에 민족 고유의 문화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연변자치주 같은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중국어를 유창하게 하지 못하시는 조부모님이 초등학교 때까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우리는 한족(중국 본토 민족으로 화하족이라고도 한다)과 무엇인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학령기 어린이가 되어 조선족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한족 학교들과 다르게 수업이 조선어로 진행되었고 한어(중국의 표준어, 북경어라고도 함) 과목이 따로 개설되어 있었다. 한족 학생들은 그들의 국어인 한어만 공부하면 되었는데, 소수민족인 조선족 학생들은 한어와 조선어를 같이 공부해야 했다. 물론 대학에 입학하게 되면 모두 한어로 수업이 진행되지만 말이다. 두 가지 언어를 어린 나이에 함께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특혜라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전혀 다른 두 언어를 익힘으로 인해서 사고의 넓이와 깊이 뿐 아니라 이해력도 더 해진 것이 사실이다. 나머지 과목인 수학, 지리, 역사, 화학, 물리 등 수업들은 한족 학생들과 동일한 내용으로서 조선어로 공부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학교에서 학생신상기록카드를 작성할 때 본적지를 적는 칸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조선족 학생들은 조부모님의 본적지에 따라 경상도, 강원도, 경기도, 평안도, 황해도 등 다양하게 기록하곤 했다. 나중에 선생님이 다시는 그렇게 기록하지 말고 현재 거주하는 주소를 적으면 된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조선족이라는 민족의 정체성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고민을 하게 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호주에서 오신 선교사님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난 후였다. 조선족 학교를 다녔지만 도심지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수업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조선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많은 아이들에게 조선어는 수업용 언어에 불과했다. 조부모님과 함께 살지 않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조선어가 많이 서툴렀다.

중학교 때 부터 조선족 교회를 출석했는데, 한국 선교사님들과 의사소통을 하려면 한국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개인적으로 학교에서 배운 서투른 조선어를 실생활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음호에 계속)
2009/11/21/ Copyrightⓒ경기복지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