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복지] 선교사와 민족, 나와 우이구르
[해외복지] 선교사와 민족, 나와 우이구르
  • 관리자
  • 승인 2010.10.11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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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와 결혼은 공유하는 여러 특징이 있다. 우선 배우자를 결정할 때 가족, 경제력, 신앙, 인격 등을 고려하는 것처럼, 섬길 민족의 역사, 문화, 경제, 정치, 민족성, 종교 등을 고려한다. 하지만 객관적인 정보가 사랑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하늘 아버지의 선택 속에 사랑은 빛과 같이 그 마음을 채운다. 결혼이나 선교의 대상을 결정하는 것은 언약의 성격을 가진다. 둘 모두를 보호하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언약이다. 결혼이나 선교사역이 유지되는 것은 상대가 완벽하고, 자신이 무흠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이해하는 것의 한계를 넘어선 용서의 비밀을 알 때에만이 가능하다. 용서는 세상의 법을 넘어선 하나님의 법이다. 그렇기에 주인 되신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따라 가는 제자들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혼생활과 선교사역을 이룰 수 있다.
나에게 우이구르족은 연인과 같다. 그녀를 알게 된 것은 1999년 교회로비에 전시된 사진을 통해서이다. 그날이후 인터넷을 통해 그녀의 뒷조사(?)를 시작했다. 그녀가 사는 곳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타클라마칸사막의 주변부다. 이곳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실크로드”의 중간 기착지였다. 그녀의 터전은 과거 동양과 서양의 문물이 지나가는 선(線)으로서 기능과, 새로운 퓨전문화를 만드는 면(面)으로서의 기능을 가진 장소이기도 했다. 이곳은 옛날 인도를 방문한 혜초(慧超, 신라승려)가 지나친 곳이기도 하다. 메마른 중앙아시아 여행길에 고단했던 대상(大商)들과 여행객들은 타림분지의 고대도시 호탄과 카쉬가르에서 달콤한 쉼을 취했다.
종교를 받아들이고 전달하는 일 또한 그녀의 몫이었다. 그녀는 원래 나무, 바위, 태양, 달, 별을 섬기던 유목민족이었으나 타클라마칸으로 터전을 옮긴 후 불교, 배화교, 마니교, 기독교(네스토리우스, 景敎) 등 다양한 종교를 받아들였다. 751년 그 유명한 탈라스전투(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중국군과 이슬람 연합군의 국제전)에서 이슬람 연합군이 승리한 이후 중앙아시아는 서서히 이슬람화 되었다. 그녀 또한 10세기에 이슬람을 받아들이기 시작해 12세기 즈음에는 완전히 빠져버렸다. 바보같이.
2002년 1월 글과 사진으로만 만나왔던 그녀를 직접 찾았다. ‘이 곳이 내가 와야 할 땅인가?’를 끊임없이 묻는 3주 여행이었다. 여행의 중반이 넘어가도 그녀의 마음을 볼 수 없었다. 사실 그녀를 향한 나의 마음을 볼 수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작은 마을에서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 낯선 한국인들을 가정으로 초대해 준 세 명의 아이들 때문이었다. 지금도 우리에게 하룻밤을 머물고 가라던 아이들, 우리가 떠날 때 눈물로 배웅해 준 그 아이들의 모습이 또렷이 기억난다. 그 땅의 어떤 자연풍광이 아니라, 작은 아이들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은 확인해 주셨다. 그곳이 바로 내가 가야할 땅임을. 그때부터 그 땅의 여행자가 아니라, 선교사가 되었다.
여행자는 보러 가지만, 선교사는 살러간다. 여행자는 사랑이라는 언약을 현지인들과 맺지 않는다. 하지만 선교사는 그 민족을 사랑한다. 여행자는 필요를 채우기 위한 언어를 배운다. 선교사는 상대의 마음을 만지기 위해 언어를 배우지만 여행자는 불쾌한 일이 있으면 그곳을 찾지 않는다. 하지만 선교사는 아플수록 더욱 기도한다. 여행자는 자신의 즐거움을 구한다. 하지만 선교사는 그 민족의 아픔을 눈물로 치료한다. 이것이 선교사와 민족, 나와 우이구르의 관계이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본질적으로 사랑이시며, 행하는 모든 것도 사랑이시다. 나와 같이 보잘 것 없는 자를 당신이 사랑하는 우이구르 민족에게 보내셨다. 그 부르심은 권위적인 명령이 아닌, 나로 그 민족과 사랑에 빠지게 함으로 확인되는 부르심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는 자를 선교사로 나아가게 하신다. 내가 함께한 민족은 열매를 쉬 보지 못하는 무슬림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떠날 수 없었다. 아니, 그래서 더 사랑했다. 아프게 사랑했다. 부르신 주님의 사랑이 그곳에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아프게 사랑하셨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호로 계속)

박용주 | CCM 작사가, 전 오엠선교회소속 중앙아시아선교사,
현 목동 지구촌교회 전도사

2010/10/10 Copyrightⓒ경기복지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