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현 교수의 생명 칼럼(4)
박재현 교수의 생명 칼럼(4)
  • 박재현
  • 승인 2006.05.13 13: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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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 사람 구실이나 하겠나?"


얼마 전에 영국의 장애인 예술가 앨리슨 래퍼가 우리나라를 방문했습니다. 두 팔이 없고 다리는 짧은 해표지증이라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입과 발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입니다.

장애를 딛고 아들을 낳아 훌륭하게 키우며 이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가는 그녀의 방한은 우리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배려를 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앨리슨 래퍼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배우게 된 것들은 우리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뿌리 깊은 편견과 차별을 극복할 수 있는 변화의 계기가 될 것입니다.

래퍼의 삶이 아무리 감동적이라 할지라도 한 장애 여성의 불과 며칠 동안의 방문이 우리 사회를 바꾸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어느 나라보다도 빨리 변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시험 직전에 벼락공부를 하고 좋은 성적을 올리기도 하는 학생처럼 짧은 시간에 놀라운 변화를 이끌어 내는 역동성이 있는 나라입니다.

장애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대책과 사람들의 생각 또한 아주 짧은 시간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오기를 기대합니다.

앨리슨 래퍼의 방한을 계기로 우리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 문제가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습니다. 래퍼의 방한이 이벤트로만 끝나서는 안된다는 점에 모두가 공감을 하고 있습니다.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과 각종 편의시설 문제가 논의되고 있습니다. 장애인의 교육과 취업에 대해서도 다양한 대책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장애 여성의 성, 임신과 출산 문제에 대한 논의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주 바람직한 일입니다 .

그러나 무언가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 뿌리는 장애아에 대한 낙태 문제에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올 3월에 서울의 한 대학교에서 장애아의 낙태 문제에 대한 모의재판이 열렸는데 의대생과 법대생의 71%가 다운증후군 태아의 낙태에 찬성한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한 장애인 단체의 회원은 한 라디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앨리슨 래퍼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집안에 방치되거나 시설에 수용”되는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가혹하게 말한다면 한국에서는 아예 태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최근 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기혼여성의 낙태원인 중 기형과 관련된 낙태가 10%를 넘고 선천적 기형으로 진단되거나 의심된다면 낙태를 고려하겠다는 임신부들의 응답이 무려 80%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선천적 기형을 가진 채 태어날 아이들도 존엄한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특별히 정이 없거나 생명윤리 의식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장애 아이를 낳아서 기르기가 너무 힘든 가혹한 사회 현실이 가장 큰 원인일 것입니다.

다운 증후군 환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제8요일이라는 프랑스 영화가 있었습니다. 실제 다운 증후군 환자가 주인공 조지 역할을 해서 장애인 최초로 깐느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영화 내용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섯째 날, 신은 인간을 만들었다. 일곱째 날, 신은 쉬었다. 그리고 빠진 것이 없나 생각한 뒤 여덟째 날 신은 조지를 만들었는데 보기에 참 좋았더라” 장애인은 이 세상을 위해 신이 보낸 선물이라는 의미입니다.

앨리슨 래퍼와 같이 바다표범 물갈퀴처럼 팔다리가 짧은 해표지증의 장애를 가진 아이가 태어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거 사람 구실이나 하겠나?”하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용감하게 “장애아라 할지라도 나는 잘 키울 수 있다”고 장담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현실은 너무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덟째 날의 조지처럼 하나님께서 “보기에 참 좋다”고 말하실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박재현 교수(경희의대 교수/ 의료윤리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