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sion]당위성과 경향성
[vision]당위성과 경향성
  • 관리자
  • 승인 2013.02.02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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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위성과 경향성”

김민철 원장
G샘통합암병원

몇 년 전 폴란드를 여행하며 오시비엥침이라는 조그만 도시에 가게 되었다. 독일 나치들이 유대인들을 수용하다가 노동력이 없어지면 가스실에 넣어 학살하던 악명 높은 곳으로 잘 알려진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는 곳이다.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가 확인시켜주고 이를 보고 또 반성하게 하는 곳이기에 한번 쯤 가보고 싶긴 했었다. 그러나 모처럼의 소중한 휴가를 가족과 함께 이 무거운 비극의 현장을 방문하는데 사용하는 것이 부담이 되기도 하는 양가적 감정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고압 전류가 흘렀다는 철조망들로 둘러싸인 빛바랜 붉은 벽돌의 수용소 건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정문 입구에 이르자 녹슨 철문 위로 고등학생 때 배운 독일어 단어들이 눈에 들어왔다.
“ARBEIT MACHT FREI”(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들이 말하는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말의 뜻이 무엇이었을까? 여기 수용된 유대인들은 건강해서 노동을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우선은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 이를 결정하는 사람은 의자에 앉아 수용된 사람들을 한 줄로 걸어오게 하고 그 외모를 보고 판단하여 손가락 하나로 좌우로 분류하면 그 뿐이었다. 한 쪽은 비교적 건강해서 노동력이 있어 보이는 사람, 한 쪽은 그렇지 못한 사람. 후자는 가스실로 직행하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한 모습으로 보이기 위해 손가락 끝을 찔러서 피를 내고 그것을 얼굴에 바르기도 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슈바이처가 생명에의 의지(Will to live)라고 말 했었을까마는 이 보다 더 근원적인 욕구는 없을 것이다.

노동은 분명 인간의 자유함의 한 부분일 수 있다. 그러나 노동이 자유함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닌 것 같다. 우리 인간은 너무 쉽게 당위성을 버리고 경향성을 좇아가는 존재이다.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할 수단들을 목적으로 쉽게 바꾸어 버린다는 말이다.

산업화 시대를 거쳐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가 세상을 움직이는 엔진이 되면서 노동이 인간을 속박하고 있는 듯하다. 노동의 목적이 전도되었기 때문이다. 자본가는 물론 정부도 개인도 모두 다 수단과 목적을 혼돈한 채로 달려가고 있다. 그래서 자의에 의해, 또는 타의에 의해 쉼 없는 노동이 강요되어도 그것이 미덕처럼 포장되어 버린다.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해 버린 채 노동에 매이게 되었다. 그 노동의 댓가로 재물을 향유할 때 쯤 되면 건강을 잃어버린 후이기도 하고 부모와 자녀들 간의 관계도 깨져 버린 후이다. 제 자리를 찾으려했더니 이미 가정은 파괴되어있고 이혼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울증으로 자살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사회 문제가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생명을 누리기 위해 추구하던 돈이 노동을 강요하는 주인 행세를 하게 되고 인간은 돈의 노예가 되어 주인을 섬긴 결과일 것이다.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에서 자본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존재하는 탐욕의 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 6:24)는 말씀을 역으로 유추해보면 인간이 재물을 신으로 섬길 수 있기 때문에 주어진 말씀이다.
그래서 유럽 개혁교회나 한국의 살아있는 지도자들이 오늘날 적그리스도를 맘몬이즘(Mammonism)으로 정한 것은 백번 옳은 결정이다. 이렇게 인간의 경향성은 당위성을 가지고 추구해야할 목적을 수단과 쉽게 전도시킨다.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독일 나치들은 이 말을 악용하여 인류 역사에 엄청난 죄악을 저질렀다. 인간은 동료 인간을 죽이기 위해 가스실을 만든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런 경향성이 타락한 우리 인간 모두의 본성(경향성, 죄성)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극단의 경향성 상황에서도 인간에게 당위성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준 대조를 통해 가느다란 가능성의 실마리를 보여준 사람들이 있었다. 왜곡된 노동이 아니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9:31)는 말씀을 이 극단의 상황에서 깨우친 사람들이다. 벗은 모습으로 동료 인간이 만든 가스실에 주기도문이나 유대 기도문을 외우며 꿋꿋이 서서 걸어 들어가며 자신의 존재를 절대자의 손에 맡긴 인간으로서의 당위적 본질을 보여준 그런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아우슈비츠 사건을 어떻게 유비해 볼 수 있을까?


2013/2/2 Copyrightⓒ경기복지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