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리스본행 야간열차
[문화산책]리스본행 야간열차
  • 관리자
  • 승인 2014.05.17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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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나보지 못한 낯선 나와의 만남
<리스본행 야간열차>

양희철

추계예술대학교 전자정보도서관 사서

4월, 하성란 작가의 글을 빌자면‘홍매화 가지에 꽃송이들이 핏방울처럼 매달리는’봄입니다. 모 방송사의‘꽃보다 할배’라는 프로그램이 떠남에 대한 우리의 숨겨둔 로망을 들추고는‘자, 어서 날아오르자’고 자꾸만 따스한 바람을 겨드랑이에 불어넣듯, 봄은 그런 간지러운 계절이죠.

파스칼 메르시어의 책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손에 잡은 후 100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저는 요즘 좀처럼 느낄 수 없었던 야릇하고도 그리운 열정 속으로 미친 듯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마치 주인공‘그레고리우스’가 망설임 끝에 계획하지 않은 여행길에 자신을 내던진 것처럼 말이죠. 저는 이 계절, 그렇게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올라탔습니다.

스위스 베른에서 고전문학 교사로 일하고 있는 초로의 그레고리우스는 어느 비 오는 날의 출근길에 다리에서 뛰어내리려는 낯선 여자를 구하게 되죠.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모국어로 포르투갈어를 사용한다는 것뿐이었지만 그 짧은 만남 후 그레고리우스는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요. 사라진 그녀의 흔적을 쫓다가 책방에서 우연히 포르투갈어로 쓰인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책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책방 주인이 번역해준 결정적인 이 한마디 때문에 그레고리우스는 꽤나 긴 이름의 포르투갈 작가‘아마데우 이나시오 드 알메이다 프라두’에 매료되고, 그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싣게 됩니다. 포르투갈어를 잘 몰랐지만 고전어에 해박한 그레고리우스는 그 여정 가운데‘프라두’의 책을 한 페이지씩 천천히 번역해가기 시작합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게 될 그의‘여행’에 관한 이야기이자 <언어의 연금술사>를 쓴‘프라두’라는 한 인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어떤 한 사람에 대해 하는 말과, 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 가운데 어떤 말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고 또 묻는‘질문의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와 실제의 나 사이에는 과연 얼마만큼의 거리가 존재할까.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죠. <올드보이>로 유명한 박찬욱 감독이 언젠가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어른들의 복잡 미묘해 보이는 ‘욕망’이라는 감정을 최후의 알맹이만 남도록 계속해서 벗겨낸다면 사실은 어린아이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어른의 욕망이 어린아이의 욕구와 근본적으로 같은 것처럼, 우리가 살면서 마주하게 되는 갖가지 문제들도 종국에는 이 책에서 묻는 단순한 질문으로 귀결되지 않을까. 바꿔 말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잘 벼려진 칼날로 조금씩 불필요한 부분들을 저미다 보면, 마침내 발가벗겨져 나 자신을 향한 본질적인 질문들만 남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삶이란 그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닌가 하고 말이죠.

그레고리우스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문득‘사는 동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매순간을 타인에게 보여 질 나의 겉모습에만 신경 쓰다가 정작 자신은 껍데기만 남는 게 아닐까’하는 두려움이 엄습할 때가 있을 겁니다. 때로는 철저한 구별짓기와 비교하기의 프레임에 갇혀버린 듯 갑갑한 우리의 모습을 느낄 때도 있겠지요. 그럴 때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올라타세요. 우리의 질문과 행선지는 타인이 아니라 항상 자신에게로 향해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될 겁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낯선 나와의 조우이자‘프라두’라는 타인을 탐구하면서 발견하게 되는 또 다른 나 자신과의 마주침이기 때문입니다.

여담이지만, 지지난주부터 스크래치가 많이 생긴 안경알 때문에 시야가 흐려져서 아예 안경테에서 알을 빼놓았었습니다. 새것으로 교체할 요량으로 잠깐 빼둔다는 것이 게을러서 차일피일 미루다 그마저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코에 걸치는 뭔가가 아쉬워 알이 없는 안경을 쓰고 다니는 요즘이었는데요. 재미있는 것은 글쎄 절친 한 명 외에는 아무도 제가 알이 없는 안경을 쓰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사람이 없었다는 겁니다. 핫하하하 하하... 35살이라던가, 그 나이가 되면 깨닫게 된다는 군요. 타인이 나에 대해 갖는 관심이 내가 상상하거나 기대하는 것만큼 크지 않다는 사실을 현실적으로 깨닫는 나이가요. 씁쓸한 현실이지만 타인의 시선에서 조금 자유로워지는 나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색하면서 걷기 좋은 계절입니다. 가벼운 복장으로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타러 나오세요. 이 열차는 <리스본행 야간열차>입니다. 마지막 정차역은 리스본, 리스본역입니다. 다 타셨으면 출발합니다. 출입문 닫습니다.



2014/05/17 Copyrightⓒ경기복지뉴스